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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속에 언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매일 같이 텔레비전과 신문을 본다. 그리고 그 뉴스를 갖고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눔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네 삶 속에 언어라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하루 아침에 없어져도 될 것인가!

언어는 우리의 인격형성

우리는 젖을 먹을 때부터 부모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기가 우는 목소리를 듣고 배고픈지 아픈지를 구분해냈다. 애기가 방긋 웃기라도 하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 부모는 서로 ‘아빠 혹은 엄마’ 라고 불렀다고 서로 세운다. 이렇게 우리는 말과 글은 어릴 적부터 부모가 표준으로 익히고 몸에 배이고 우리의 혼으로 자리잡게 된다.

언어가 없다면・・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의 모국어사용금지 조치가 벌어지며 소수민족의 탄압을 시작한 중국당국에 시위와 반발과 학교 등교를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뉴스를 듣고 지난 역사 속에 우리민족의 아픔 중에 나라의 말과 창씨개명을 하였던 시기가 생각이 난다. 그 결과 7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도 서로 민족감정이 있어 정부와 정부가 합의되면 이루어질 많은 일들이 미루게 되는 것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자동차나 신간센을 타고 한반도를 거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꿈인 일한터널이 언제 이루어질까 염원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 꿈이 더디게 이루어 지는 이유를 조사해 보면 식민지 시대에서 한글사용금지(1938.4)와 창씨개명발표(1939.11.10) 등이 국민감정으로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세계평화와 봉사활동으로 새로운 면모를 꾸준히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마찰과 봉합이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렇다고 제4차산업시대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공생・공영・공의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아픔을 이겨내고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나라와 싸우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는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민족의 혼

중국과 내 몽골의 간의 역사적인 관계는 타국에 사는 필자 입장에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런데, 몽골어는 한글과 일본어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언어이고 正論10월호를 읽어 보면 다음 같은 내용이 있다.

Photograph of the Finnish linguist and explorer Gustaf John Ramstedt (1863–1950).

“1919년부터 10년간 핀란드 주일대일공사로 근무하였던 Ramstedt,G,J(1863-1950년)은 일본어・조선어의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알려 주고 싶은 언어는 몽골어 학자였다.” 이 구절을 통하여 세계적인 관점에서 몽고어는 표현이 다양성이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될 줄도 모른다.
중국도 한일간의 갈등이 언어와 창씨개명으로 인하여 오늘날 서로 돕고 사는데 상당히 지장이 있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 동북아 중심으로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세계와 가치의 중심권이 되기 위하여 대국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언어는 단지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그 민족만이 통하는 혼이 들어 있기에 국력이 약할 때는 박해를 받을 지는 몰라도 반드시 부활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고차적인 문화는 언어로부터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제가정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문선명 총재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평화세계를 이루는 데에 국제결혼 이상의 직단거리가 없습니다. 국경에서 전부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원수가 되지, 멀리 있는 사람은 원수가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세계가 빨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서 원수 국가의 사람들끼리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은 평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천성경10편제3장2절3)

실제적으로 언어는 통일시키고 화합을 시킵니다. 원수도 같이 살다 보면 말이 통하게 되고 오해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오해를 하거나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 실례로 히로시마에서 시아버지가 아들에게 「今日は、えぇがにいったのか?(에가니 잇다까)」물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의 귀에 ‘영화를 잘 보았느냐?’라고 들리는 바람에 ‘내 몰래 영화 보러 갔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을 잘 마쳤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시는 일본부인은 시부모보고 ‘잘 주무세요’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잘 죽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서로 위해 주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언어는 통일시키고 화합을 시킵니다. 원수도 같이 살다 보면 말이 통하게 되고 오해도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오해를 하거나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 실례로 히로시마에서 시아버지가 아들에게 「今日は、えぇがにいったのか?(에가니 잇다까)」물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의 귀에 ‘영화를 잘 보았느냐?’라고 들리는 바람에 ‘내 몰래 영화 보러 갔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아들에게 일을 잘 마쳤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시는 일본부인은 시부모보고 ‘잘 주무세요’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잘 죽으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서로 위해 주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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